편견과 혐오를 걷어낸 존중과 긍정의 언어
농인성소수자X한국수어 소개
한국농인LGBT(준)은 어떤 언어든 그 언어를 사용할 사람들이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농인성소수자와 동료 활동가가 나섰습니다. 혐오수어 대신 사용할 편견 없는 한국수어를 개발했습니다. 문제 되는 한국수어를 추려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한국수어를 만들었습니다. 〈농인성소수자✕한국수어: 편견과 혐오를 걷어낸 존중과 긍정의 언어〉(이하 〈농인성소수자✕한국수어〉)는 그러한 분투의 결과물입니다.
〈농인성소수자✕한국수어〉는 성소수자의 존재와 경험을 단순화하고 희화화하는 한국수어의 성소수자 혐오 양상을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성소수자 혐오수어를 사용해 온 농사회의 성차별적이고 비트랜스젠더-이성애중심적 환경을 비판적으로 돌아봅니다. 현실 비판을 토대로 농인성소수자가 대안 어휘를 개발하여 농접근권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공유하고 토론에 부칩니다. 대안 어휘의 개발 과정과 남은 과제를 소개하며 향후 농사회와 청사회가 농인성소수자 인권 운동으로 더욱 긴밀하게 연대할 길을 닦습니다.
한국수어의 성소수자 혐오
청사회의 성소수자 공동체와 운동 진영은 성소수자의 존재와 경험을 가리키는 적절한 한국어 용어를 꾸준히 개발해 왔습니다. 동성애를 병리화하는 뉘앙스로 쓰이던 “호모”나 “동성연애자”라는 말이 아닌 존재 그 자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동성애자”라는 말이 자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이성애자의 존재와 경험만을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데 반발하여 다름을 긍정하는 저항의 차원에서 “이반(異般/二般)”이라는 이름을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비규범적인 성별 표현이나 성적 실천을 이유로 차별받고 배제되는 존재를 사회적 약자라는 의미에서 “성소수자”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한국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널리 쓰이는 “퀴어”라는 말도 서구 사회에서 괴상하고 기이하다는 뜻으로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멸칭으로 오래 사용되었으나 성소수자가 직접 자기 언어로 가져오면서 규범을 벗어난 다름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한국어에는 여전히 혐오 표현이 많지만, 청인성소수자가 직접 마련하거나, 고쳐 쓰거나, 필요에 따라 다른 언어에서 들여와 쓰는 혐오 없고 편견 없는 표현을 사용해 그러한 혐오 표현을 비판하고 없애나갈 수 있습니다.
농사회의 제1언어인 한국수어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동성애자를 나타내는 한국수어는 동성애자가 대체로 항문섹스에만 관심이 있으며 무수한 파트너와 성관계 하는 “문란한” 존재로서 에이즈의 주범이라는 깊은 편견에 기반합니다. 게이를 나타내는 한국수어는 “항문섹스를 하는 남자”로, 레즈비언을 나타내는 한국수어는 “여자와 몸을 비비는 여자”로 표현하는 식으로, 성소수자의 존재에 지극히 섹스 중심적으로 접근합니다. 성소수자의 존재와 경험을 가리키는 한국수어 대부분이 성소수자 혐오적인 실정입니다. 국립국어원 한국수어사전 등재 어휘뿐만 아니라 비등재 단어인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퀴어” 등도 성적인 측면에 치우치거나 혐오적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성소수자의 존재와 경험을 가리키는 한국수어는 농인인 비트랜스젠더-이성애자들이 만들어서 사용해 온 말들로, 당사자인 농인성소수자가 사용하면 자기비하가 되어버리는 몹시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농인성소수자는 본인의 성소수자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차별 반대를 주장하고자 할 때조차 성소수자 혐오적인 표현을 동원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부닥칩니다. 기존의 한국수어로는 농인성소수자가 자기 존재와 경험과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탐색하고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내용과 각종 정보가 한국어 → 한국수어 통역을 통해 농사회에 공유되는 과정에서도 성소수자 혐오수어를 완전히 피하기 어려워 곤란한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만든다
한국농인LGBT(준)은 농인성소수자가 불가피하게 혐오수어를 사용하여 자기비하적인 언어생활을 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합니다. 성소수자 인권을 다루는 행사와 자료조차 혐오수어로 통역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한국 농인에게는 한국어만을 중심으로 하여 성소수자 관련 정보가 형성되고 유통되는 청인중심적 조건에 개입하고자 합니다. 한국어 중심의 정보 유통과 농학교에서의 한국수어 교육 부족이라는 복합적인 언어 접근성 문제를 아울러 고려하여, 농인성소수자의, 농인성소수자에 의한, 농인성소수자를 위한 한국수어 성소수자 어휘를 개발하고 알려내겠습니다. 개발한 새 어휘는 농인성소수자 커뮤니티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계속해서 재검토하여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겠습니다. 매년 농인성소수자인권대회(가)를 열어서 개발 한국수어 사용 현황을 나누고 농인성소수자의 경험에 입각하여 한국수어를 지속해서 업데이트 해나가겠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만든 대안 한국수어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불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 책자를 더 많은 농인성소수자 당사자와 만나 같이 이야기해 볼 기회를 늘리기 위한 첫 삽 뜨기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많은 분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설레고 떨립니다.
우리는 농인성소수자 친목모임에서 대안적인 성소수자 한국수어 용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지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활동합니다. 원래 단어 하나를 새 단어로 대체하는 데 그치기보다, 농사회에 만연한 성소수자 혐오를 없애고 농인성소수자가 자긍심을 높이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겠습니다.
〈농인성소수자✕한국수어〉는 농인성소수자가 자신을 더 잘 존중하기 위해 어떤 말을 거부하고 어떤 말을 빚었는지를 기록합니다. 자신의 존엄을 지켜낼 언어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풀어낼 말의 권력을 확보해내는 모습을 증언합니다. 성소수자를 표현하는 새로운 한국수어로 여러분에게 말을 겁니다. 여러분의 응답을 기대합니다.